[전문가 서평] ‘벽이 만든 세계사’ - 목적을 위한 희생, 공감을 위한 함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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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서평] ‘벽이 만든 세계사’ - 목적을 위한 희생, 공감을 위한 함생
  • 정훈 문헌연구가
  • 승인 2020.07.1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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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벽이 만든 세계사’ 표지 이미지 / 사진 = 을유문화사
책 ‘벽이 만든 세계사’ 표지 이미지 / 사진 = 을유문화사

[서평전문지_모먼트 = 정훈 칼럼니스트] 대한민국의 최북단 지역, 북한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국경선 부근에는 비무장지대가 존재한다. 비무장지대는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가면서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각각 2km씩 군대를 후퇴시키기로 합의한 결과로 만들어진 지역이다. 임진강 하구인 경기도 파주시 정동리에서 동해안인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 총 248km 가량 존재하는 비무장지대는 그 이름과는 달리 아이러니 하게도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역 중 하나이다.
 
비무장지대는 처음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철책선의 형태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군사분계선은 이곳이 군사분계선이라 알려주는 표시가 새겨진 말뚝이 분계선을 따라 쭉 이어진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2km 안 쪽의 중심지역에 세워진 요새인 GP와 2km 이후에 세워진 요새인 GOP가 건설되어 북한을 경계했다. 우리가 DMZ하면 생각하는 철책선은 1964년에 남방한계선에 목책을 건설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970년대 초에 와서 위쪽에 철조망을 두른 대략 2미터 높이의 철책으로 완성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 사진 = 서평전문지 모먼트 DB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 사진 = 서평전문지 모먼트 DB

2020년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보다 군사분계선의 존재 이후 태어난 이들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의 이동을 물리적으로 가로막는 저 기다란 방벽이 존재하는 것을 별로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경에는 으례 저런 철책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다 해외로 나가서 국경을 지나갈 때, 한국에서 도나 시의 경계를 넘어갈 때처럼 여기서부터 국경이 달라진다는 표지판만 있을 뿐 별다른 철책선이 없는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이렇게 특정 지역의 통행 자체를 막아버리는 장벽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쉽게 볼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장벽이 건설되기까지 특별한 이유가 존재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역사에 존재했던 거대한 장벽들이 세워지는 과정을 따라가보는 특별한 여정을 해본다면 어떨까.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이자 각종 역사의 대중화에 활발한 활약을 하고 있는 함규진 교수의 책 <벽이 만든 세계사>는 세계사의 물결을 가른 열두 ‘장벽’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역사의 본질을 돌아본다. 총 네 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1부에서는 만리장성, 하드리아누스 장벽,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같은 고대의 장벽을, 2부에서는 토끼 장벽, 코뮌 장벽과 같은 근대의 장벽을, 3부에서는 마지노선, 게토 장벽, 베를린 장벽 등과 같은 20세기 이후의 장벽을, 마지막 4부에서는 팔레스타인 장벽, 난민 장벽, 사이버 장벽 등 현재진행중인 장벽들에 대해 다룬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 사진 = 서평전문지 모먼트 DB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 사진 = 서평전문지 모먼트 DB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장벽 중 가장 유명한 장벽을 꼽아보자면 ‘만리장성’을 빼놓을 수 없다. 만리장성은 고대 한나라 때부터 청나라를 지나 본래의 기능과는 동떨어졌지만 강력한 관광상품이 된 현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떨치는 장벽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본능적으로 너와 나, 우리와 저들을 나눈다. 우리의 울타리에 속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우리의 울타리 밖 사람들에겐 냉정하고 무자비해지기도 한다. 이런 본능적인 의식의 물리적인 발현 중 하나로 거대한 장벽을 꼽을 수 있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수단은 다양하지만 확실한 표현 중 가장 강렬한 것이 바로 장벽 아니겠는가. 장벽 안쪽의 사람들에게는 안도감 혹은 우월감을, 장벽 밖의 사람들에겐 자신을 밀어낸 장벽 안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장벽 안의 토지에 대한 탐욕을 자극하기도 한다. 장벽은 그 존재만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리장성은 장성의 남쪽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북쪽의 기동력을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등 군사적 효과가 분명 뛰어났지만 반대로 좀처럼 통일되기 어려운, 다종다양한 부족들이던 북쪽의 다양한 기마민족들이 흉노족, 선비족, 몽골족, 만주족 등의 이름으로 하나로 뭉침으로써, 장성을 돌파할 정도의 숫자와 위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만약 만리장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 사진 = 서평전문지 모먼트 DB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 사진 = 서평전문지 모먼트 DB

반대로 외적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고자 하는 본래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한 방벽도 존재한다.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자 했던 프랑스 민중, 파리 코뮌 전사들의 바리케이드는 이들을 진압하려는 정규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저항을 위해 뭉쳤으나 제대로 된 석벽도 아니었고, 근처에서 볼 수 있는 구조물로 얼기설기 모아 세웠던 장벽은, 정규군의 대포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미약한 바리케이드에 의지해 저항했던 민중들 역시 스러져버렸다. 하지만 파리 코뮌의 바리게이트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이후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민중들이 집결하는 상징으로써 남게 되었다. ‘바리케이트를 쌓는다’는 것은 바리케이트 밖의 상대와 맞서 싸우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장벽은 주로 가장 일차적인 목적인 ‘외세로부터 우리를 지킨다’라는 목적을 위해 건설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종의 분리를 위해 쌓은 ‘게토 장벽’, 정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의 이동을 강제한 ‘베를린 장벽’, 자신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전진기지의 역할을 목적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분리장벽’ 등 다종 다양한 목적에 의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떤 장벽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해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에도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이동을 가로막는 장벽들이 세워지고 있다. 어쩌면 쇠와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장벽 그 자체보다는 그 장벽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만드는 제도와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 더욱 두려운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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